[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25>] 풍운아 이회택, 프로무대 전면에 나서다

김덕기 2013. 4. 10.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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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풍운아 이회택' 그는 항상 풍운을 몰고 다녔다.

동북고를 졸업한 1966년 대표팀에 처음 선발돼 1977년까지 10년 이상 태극마크를 달고 명센터포워드로 그라운드를 누볐으나 4차례나 대표팀에서 탈락과 복귀를 거듭하는 파란의 주역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도중 감독에 항명함으로써 1977년 불명예 퇴진한 것이 대표선수 생활의 마지막 이었다.

1971년 제20회 뮌헨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 말레이시아에 졌을 때는 죄책감에 삭발을 단행,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관중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에 가슴이 터질 듯 했고 패전에 대한 책임이 집중될 때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1985년 12월11일 저녁 남서울호텔 일식집. 한양대 이회택감독은 탁자 위에 펼쳐진 계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끝없는 상념에 잠겨 있었다.

"회택아 잘해보자."

한양대 선배인 포철 최은택 감독이 손근석 포철 단장을 의식해서인지 소주잔을 권하며 말을 건네 왔다.

술잔을 단숨에 비운 이회택감독은 1년여동안 끌어온 계약서에 서명했다. 최은택 감독으로부터 "함께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며 정식 코치직을 제의 받은 지 2개월만이었다.

포철은 이회택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1984년부터 끈질긴 교섭을 벌여 왔으나 그가 모교인 한양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포철 코치인 선배 박수일과의 의리를 내세워 고사하는 바람에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한양대 김창기 체육실장은 이 같은 사정을 전해 듣고 "모처럼 좋은 기회인데 열심히 해보라."고 권유한데다 박수일 코치가 사퇴함으로써 이회택 감독은 포철 코치로서 프로축구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포철의 창단멤버로 1973년부터 1979년까지 활약한 뒤 은퇴한 이회택감독으로서는 6년만의 친정팀 복귀였다.

1983년 7월에는 브라질 상파울루클럽에서 6개월간 축구 지도자 수업을 쌓은 것을 비롯, '절대 때리지 않고 욕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한양대 선수들을 지도, 3년동안 4개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어 현역시절 화려했던 명성만큼 지도자로서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83년 슈퍼리그 종합 4위에 이어 1984년 시즌 막바지에 아마추어 은행팀들에 연패, 우승의 기회를 놓쳤던 포철은 이 같은 능력을 발휘한 이회액택독이 팀내의 최순호 이흥실 등 스타플레이어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적격자로 보고 교섭에 나섰던 것이다.

김덕기(스포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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