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축구박물관 건립추진위원장, "축구 유토피아 같은 축구 박물관을 만들겠다."

김석현 선임기자 2012. 9. 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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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장독 속에 감춘 운동화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새 운동화를 사 주고는 며칠 지나 그 운동화를 장독 속에 감췄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언제나 비싼 돈을 들여 새 신발을 사주기만 하면 바로 신고 나가 여기 저기 다 찢겨진 채로 들어오니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산지 하루 이틀 밖에 안된 새 운동화가 왜 여기 저기 찢겨진 헌 신발이 돼 버린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새 운동화를 신고 공을 찼기 때문이었다.

축구를 했다는 얘기다. 이른바 '동네 축구'.

'한국 사람치고 어렸을 때 축구선수 아니었던 사람 어디 있느냐'는 우스개 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조금 유별났던 모양이다.

곁에 축구공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하루라도 공을 차지 않으면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하는 진부한 표현의 '축구 소년'이었다고나 할까.

그랬던 그가 어느덧 '50 고개'를 훌쩍 넘어 '축구박물관 건립추진위원장'이라는 작지 않은 직함으로 축구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이재형(51).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아도 최소한 축구계에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인사'가 돼 있으니 나름대로는 '성공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축구박물관 얘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 먼저 어린 시절 추억부터 더 들어보자.

"저희 집이 성북동이었거든요. 그래서 성북국민학교를 다녔지요. 그때 학교대표 축구 선수로 학교대항 축구대회에 나가서 득점상도 받고 그랬습니다. 아마 중학교를 축구팀이 있는 학교로 갔으면 저도 유명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습니다."

추첨으로 배정받은 학교가 홍익중이었는데 그 학교에 축구팀이 없어 축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축구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누구든지 축구화를 신은 사람이나 아니면 축구화만 봐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아마 축구선수가 되지 못한데 대한 보상심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요."

▲ 축구선수가 되지 못한 한을 축구박물관 건립으로 풀 터

축구선수가 되지 못해서 가슴에 맺힌 한을 푸는 방법은 단 한가지. 그게 바로 멋진 축구박물관 건립이라는 게 그의 생각인 것 같다.

"멋진 정도가 아닙니다. 한국 최고 최대의 축구박물관을 건립하겠습니다. 그 박물관에다 제가 어린 시절 그렇게도 신고 싶었던 각종 축구화는 말할 것도 없고 축구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해 누구든 그곳에만 오면 나가고 싶지 않은 축구 유토피아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씨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 선후배 10여명과 함께 지난 6월21일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국제회의장에서 '축구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창설 기념식을 열고 자신이 위원장을 맡는 한편 이들 10여명은 추진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런가 하면 작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출마 여부를 놓고 관심을 모았던 이석연 변호사가 이 위원회의 고문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공사는 진행 중인 걸까.

"아닙니다. 축구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원칙만 세웠을 뿐 어디다 지을 건지, 아니면 건물을 매입해 박물관으로 사용할 건지, 그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 건지 등등의 문제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건립에 소요되는 재원의 확보가 쉽지 않거든요."

계획만 세워놓고 추진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뜬 구름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직 상세히 밝힐 단계가 아니어서 구체적인 말씀을 드릴 수가 없고…. 연말 안으로 건립에 관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해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기대를 하라니 하는 수 밖에. 그의 말대로 세계최고 최대의 축구 유토피아가 탄생하길 바랄 뿐이다.

▲ 축구용품 수집가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재형'하면 축구박물관 건립추진위원장이 아니라 축구용품 수집이 본업이요 본직이다.

글자 그대로 축구에 관한 모든 물건을 수집하는 일 말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그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축구박물관 건립작업은 이 수집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축구선수가 되지 못하니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축구와 관련되는 물건에 엄청나게 애착이 가더라고요. 우표나 엽서, 그리고 축구공이 그려져 있는 저금통 같은…. 축구 기념우표가 나오는 날은 새벽부터 우체국 앞에서 기다라고 있다가 제일 먼저 뛰어들어가서 사온 적도 많습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축구에 관련된 물품을 모으다 보니 점점 범위가 넓어져 선수들의 유니폼, 신발, 그리고 국제 경기 때 양팀 주장이 주고 받는 페넌트까지 사서 모으게 되더란다.

그래도 오늘날과 같은 국내 최고의 전문적인 축구용품 수집가가 된 데는 뭔가 커다란 계기가 있지 않弩뺑?하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물론이지요, 1996년 5월 쯤이었을 겁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 중앙언론사의 기자가 저희 집을 찾아 왔더라고요. 그래서 그 신문에 제 기사가 아주 크게 나갔습니다. 그러고 또 얼마 있다가는 한 스포츠 TV의 기자가 저를 찾아와서 인터뷰를 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서너 번 언론을 타고 나니까 제 이름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알려져 있더군요."

그때부터 '유명 인사' 반열에 들어서 언론사의 인터뷰나 방문취재를 받은 것이 수 십 차례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에 마침내 큰 기회가 왔다.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가 결정되고 나서 얼마 안된 1997년 초, 서울 시내 모 백화점 전시장에서 열린 '한일월드컵의 성공개최를 위한 이재형 축구소장품 전시회'가 그것.

"대한중외제약에서 1,500만원을 지원해 주셔서 열게 된 전시회였는데요. 저 자신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은 분이 전시장을 찾아주시다니. 축구가 정말 우리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습니다."

▲ 언론사들로부터 엄청난 각광

보름에 걸친 전시회 기간 동안 찾아온 손님 만도 1만 여명.

전(全) 중앙지는 물론 3개 TV 방송사가 연일 카메라를 메고 찾아오는 통에 한 100평 남짓한 전시장이 관람객들과 어우러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것.

"그 이후로는 거의 매일 여러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찾아오는 거에요. 뭐 어떡합니까. 응하는 수 밖에요. 건방지다 소리 들으면 안되잖아요. 게다가 롯데, 신세계, 뉴코아 같은 유명백화점에서도 서로 경쟁하듯이 축구용품 전시회를 열자고 요청을 해오더군요. 돌아가면서 다 했지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그때 돈 좀 벌었습니다."

한ㆍ일월드컵의 개막이 2개월 앞으로 임박한 2002년 4월에도 그로서는 잊을 수 없는 큰 경사가 생겼다.

서울 명동의 당시 서울은행 본점 로비에서 1개월 예정으로 개최한 '한국 축구 역사관'.

그때까지 그가 소장하고 있던 각종 축구관련 물품 5,000여 점을 총망라해 전시한 이 행사 역시 공전의 대성황을 이뤄 연장에 연장을 거듭한 끝에 한ㆍ일월드컵이 끝나고 2개월이 지난 9월초까지 전시회를 계속했는데 이때 벌어들인 수익금만도 3,000만원이 넘는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벌어들인 액수가 제법 될 것 같은데 다 어디다 썼는지 하는 의문 말이다.

"재투자했지요. 뭐."

재투자라니. 무슨 부동산이나 주식투자는 아닐 테고.

"물건을 계속 사들였다는 얘깁니다. 축구와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지금 제가 소장하고 있는 물건이 한 4만 건 정도 되는데 이중 단 하나도 어디서 공짜로 얻은 것은 없습니다. 다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항상 현금을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합니다. 사고 싶은 물건이 나왔을 때 당장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다음날 어렵게 돈을 구해 사러 가보면 이미 다른 사람이 사버리고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안정환의 골든 볼 구했을 때의 감격 생생

안정환이 2002년 6월18일, 이탈리아와의 한ㆍ일월드컵 16강전에서 터뜨린 골든 볼을 어렵게 구해왔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2003년 6월이었지요. TV에서 월드컵 1주년 특집방송을 보고 있는데 이탈리아 전 주심을 맡았던 에콰도르의 바이런 모레노씨가 그 경기에 사용됐던 공을 들고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에요. 그 순간 저 공을 어떻게 하든 한국으로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 이 공이 당연히 대한축구협회 자료실에 보관돼 있는 줄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

"모레노가 이탈리아 전에서 이탈리아 공격수 토티에게 레드카드를 꺼내 드는 장면을 동판으로 만들어 선물로 가져갔지요. 그런데 2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에콰도르의 키토에 도착해 그의 집을 찾아가니 그 전날 미국의 마이애미로 출장을 갔다지 뭡니까. 그것도 20일이나 넘게 있어야 온다는 거에요. 하는 수 없이 현지 교포에게 그에게 줄 선물과 편지를 맡겨두고 서울로 돌아와 답이 오는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지요."

한 달이 지났을까.

"안되나 보다 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는데 그 교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모레노가 가족회의를 몇 번이나 하며 고심한 끝에 제 성의를 생각해 제게 그 공을 주기로 했다고 말입니다. 정확히 말씀 드리면 2004년 3월6일, 공무로 귀국하는 키토 주재 한국대사관의 직원을 통해 인천공항에서 그 공을 전달받았습니다. 그 때의 감격이란…."

그에게는 이것 말고도 또 하나의 '업적'이 있다.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라 스페인과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속에서도 승부를 내지 못해승부차기에 들어갔을 때 홍명보가 4강 진출을 결정지은 5번째 킥의 공을 구해온 것 말이다.

▲ 홍명보의 스페인전 승부차기 공은 우주만큼 소중

"이건 안정환의 16강 골든 볼 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극적이었습니다. 우선 8강전의 주심을누가 맡았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주인공이 이집트의 알 간두르라는 사실을 어렵게 알아냈지요. 그래서 이집트축구협회에 이메일을 보내 간두르의 주소를 찾아냈습니다. 다시 간두르에게 이메일을 보냈지요. 축구공 얘긴 안하고 그냥 한번 만나고 싶다고만 했습니다. 내게 그 공 팔라고 얘기하면 값을 엄청나게 부를 것 같아서요."

모레노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수법'이 아닌가.

"맞습니다. 어쨌거나 얼마 뒤 간두르에게서 답이 오더군요. 자기 직업이 세무사인데 이집트에 오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돈도 없고 하여튼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 바로 이집트에 가지 못하고 있다가 2006년 8월5일에야 카이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엄청난 금액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살고 있던 아파트를 담보로 잡혀 은행에서 받은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달러로 바꿔 '007 가방'에 넣은 채….

"카이로에 도착해 현지에서 민박을 운영하고 있는 교포를 통해 간두르에게 연락을 취했지요. 어렵게 카이로에서 100km 가량 떨어진 라합에 사는 간두르의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경비실을 통해 들어갈 정도로 아주 큰 저택이더군요. 정원에서 양고기 바베큐에 와인을 곁들여 저녁을 먹은 뒤 넌지시 공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지요."

중동사람들과는 무슨 일이든 쉽게 결말이 나지 않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게다가 그 사람이 그 공에 대한 애착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돈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라 돈으로 승부를 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그래도 어떡합니까. 저녁 먹고 나서 밤 12시까지 4시간을 설득했지요. 그 공은 선생께도 중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하지만 한국 국민 모두에게 그 공은 국보와 같이 중요한 물건이다. 그러니 그걸 우리에게 넘겨달라고요."

그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가족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란다.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예상 외로 금방 나오는 거에요. 그것도 아주 밝은 얼굴로. 그러더니 당신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고마워 이 공을 주겠다. 나중에 축구박물관을 건립할 때 나를 초청해 달라면서 아랍어로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공을 바친다'고 쓴 메모와 함께 그 공을 주더군요. 이 세상에 어떤 보물이 이보다 소중하고 귀한 게 있겠습니까. 그땐 정말 온 우주를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4만 건의 축구용품 하나하나에 이런 애환이 실려 있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는 그 비중이나 가치가 조금 더 높은 것일 뿐.

그의 '열정'을 한가지만 더 소개하자.

"2005년도였을 겁니다. 인터넷에서 영국축구협회를 들어가보니 경매물건이 죽 나열돼 있는데 그 중에 북한의 물건들이 적혀 있는 거에요. 자세히 살펴보니까 1966년 런던월드컵축구에 참가한 북한 선수들이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이 입고 있던 유니폼과 신발, 가방 같은 것들을 헐값에 팔고 북한으로 돌아갔던 겁니다. 바로 런던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 갔지요. 돈을 주고 사긴 샀지만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2년 뒤인 2007년 서울에서 열렸던 17세 이하 청소년축구대회에 북한 팀의 단장으로 참가한 이창명(런던월드컵 당시 북한 골키퍼)씨에게 그 물건들을 보여주니까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더라고 한다.

여비 마련을 위해 이 물건들을 팔아야 했던 자신의 '슬픈 과거'도 함께 생각나지 않았을까.

몇 가지 더 물을 게 있는데 어디선가 그에게 핸드폰이 온다.

가만히 들으니 또 좋은 물건이 나왔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그래서 빨리 가보라고 손짓을 하고 먼저 찻집에서 나왔다.

김석현 @naver.com

김석현 선임기자 kimmin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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