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기의 프로축구 30년 ⑦] 유태목, 100호골 축포 터뜨리다

김덕기 2013. 2. 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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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프로축구 통산 100호골.

1세기 역사의 한국축구가 프로축구 출범으로 거듭나는 단계에서 도약의 가시적 증좌로서 나게 될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어린아이의 백일잔치를 비롯해 '100'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바는 자못 크다. 태동과 탄생의 혼돈과 고통을 극복해 내고 성장과 발전의 틀을 완성시켜 가는 길조의 의미라고 볼 때 1983년 5월8일 박윤기의 개막 축포가 울려 퍼진 뒤 137일 37게임 만에 터져 나온 100호골은 프로축구의 정착과 발전을 상징하는 신호탄이었다.

1983년 9월22일 동대문운동장에서 프로축구 원년 우승을 눈앞에 두고 대우와 할렐루야가 막판 치열한 혈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마침내 100번 째 득점포가 터져 나왔다. 이 역사적인 영광의 주인공은 대우 주장 유태목이었다. 이날 경기를 이기기만 하면 우승이 확정되는 대우는 전반에 할렐루야 오석재에게 99호골을 헌납했다. 100호골을 기록할 확률은 대우 할렐루야 반반이었다.

그러나 100호 골은 대우가 뜻밖의 페널티킥으로 얻어냈다. 후반 1분 대우 김민혜가 할렐루야 페널티박스 왼쪽으로 흐르는 불을 가까스로 빼내 문전으로 밀어 넣으려하자 GK 조병득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 순간 백봉기 주심의 긴 호루라기 소리가 동대문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이때 대우 장운수 감독의 눈은 황급히 유태목을 찾고 있었다. 21,366 명의 관중들은 개막 이후 단 한골도 넣지 못한 유태목이 페널티박스로 걸어 나오자 전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장운수 감독은 1981년부터 킥에 관한한 두터운 신임을 두고 전담 키커를 맡겨온 '롱킥의 명수' 유태목의 정교함과 침착성을 굳게 믿었다. 유태목은 100호 골의 기회를 마련 해준 조병득의 창백한 얼굴을 흘끔 본 뒤 어김없이 강렬한 킥으로 할렐루야 골네트를 갈랐다.

"그 킥이 100호 골인 줄은 전혀 몰랐다."는 유태목은 경기가 끝난 뒤 장내방송을 통해 뒤늦게 알았으나 내놓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후 15분 뒤인 후반 16분 할렐루야 이정일에게 결승골을 내줘 우승 문턱에서 주춤한 대우는 끝내 원년 우승 트로피를 할렐루야에 넘겨줬다.

경기가 끝난 뒤 부상으로 받은 오토바이를 타고 100호 골 축하 세리머니로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유태목의 귓가엔 2만여 관중의 축하 함성도 박수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유태목은 "그날 승리했다면 팀 우승에 개인적 영광까지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 했다.

대구 계성고와 연세대를 거쳐 프로 원년부터 1985년까지 대우에서 활약했던 유태목은 1986년 현대로 이적, 2년간 선수생활을 하다 은퇴했다.

김덕기 (스포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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