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똥이' 지소연, 시련 넘고 '지메시'로 우뚝

2010. 7. 2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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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고상민 기자 = "어릴 적 별명은 지똥이였어요"6골을 몰아넣으며 U-20 여자축구 4강 신화를 이끈 지소연(19)은 지금 축구팬들 사이에서 '여자 박지성'을 넘어 '지메시'로 불린다.

161㎝의 작은 키에도 뛰어난 볼 컨트롤과 패싱 능력, 골 결정력까지 갖춰 '지느님'이라는 찬사도 쏟아진다.

하지만 지소연의 진짜 별명은 따로 있다.어머니 김애리(43)씨는 지소연이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이 작고 피부가 까만 탓에 '지똥이'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지소연이 본격적으로 공을 차기 시작한 건 이문초등학교 2학년이던 1998년.운동장에서 남자 아이들과 공을 차며 놀다 당시 이문초 축구부 김광열 감독의 눈에 우연히 띈 것이 계기가 됐다.

김광열 감독은 지소연의 재능이 아깝다고 판단해 이문초 축구부에서 남자들과 함께 훈련을 하게 했고 멀리 떨어진 송파구 오주중학교로 진학시켜 본격적인 여자 축구를 접하도록 도움을 줬다.

당시 오주중 여자 축구부 감독은 최인철 현 U-20 여자 대표팀 감독.지소연과 최인철 감독의 인연은 동산정보산업고를 거쳐 지금의 대표팀까지 이어졌다.15세부터 17세, 19세, 20세 이하 대표팀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태극마크를 단 지소연은 누가 봐도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다.

하지만 가정환경은 그야말로 자갈밭 길이었다.동대문구 이문동. 지소연의 집은 외대앞 가파른 언덕을 올라 구부러진 골목길을 한참 지나야 다다를 수 있었다.

밖으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 스테인리스로 된 문짝을 열자 10평이 채 안되는 세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부가 지원한 보증금 7천만원 짜리 전세임대방.

가족이라곤 어머니와 고등학교 2학년 남동생, 강아지 '방울이'가 전부였다.주방 앞 벽면엔 지소연이 지금껏 목에 건 메달과 15세 이하 대표팀 유니폼이 초라하게 걸려 있었고 백일 된 아기 지소연은 앨범이나 액자가 아닌 벽지에 붙어 웃고 있었다.

축구 선수로 자라온 지소연의 유년기 사진들은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조그만 거실 모퉁이에 한데 엉켜 쌓여 있었다.

어머니 김씨는 "소연이 사진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애 아빠가 다 불로 태워버려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소연의 아버지는 딸이 축구하는 것을 몹시 반대했다. 사내들 사이에서 뒹구르며 훈련하는 딸의 모습이 내키지 않았고 어려운 경제 사정에 운동하는 아이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 비용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김씨는 "딸 아이가 좋아하는데 관두게 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뒷바라지 했다"고 말했다.

사실 김씨도 초등학교 때 운동을 했다. 어릴 때부터 체격이 좋아 주변의 권유로 4학년이 되던 해 핸드볼을 시작한 것.

하지만 김씨 역시 어려운 가정 살림으로 6학년 때 핸드볼을 포기해야 했고 중학교도 도중에 그만둬야 했다.

그래서 내 아이만큼은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운동을 관두게 할 수 없다는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이의 경기장을 따라 다니며 뒷바라지를 했고 이에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불화는 계속 됐다.

지난 2002년,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축제 분위기였지만 정작 지소연의 집안엔 불행이 깃들었다.

어머니의 자궁암 판정과 설상가상으로 닥친 부모의 이혼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공 하나에 희망을 걸던 11살 어린 소녀가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찼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절박한 환경에서 자라 딸이 그만큼 철이 일찍 들었다며 못내 안타까워했다.

원래 어린이 지소연의 성격은 쾌활하고 정의감 넘치는 다혈질 소녀였다.초등학교 시절 불법으로 책을 파는 노점상을 따라다니며 친구들에게 "저 사람 사기꾼이니 절대 사지마"라고 하다 엉덩이를 걷어차이는가 하면, 중학교 시절엔 매번 오주중학교에 패해 골이 난 다른 학교 축구부가 걸어온 패싸움에서 상대 학생 이빨이 모두 뽑히도록 두들겨 팬 적도 있다.

그날 패싸움으로 오주중학교 학부모들이 물어야 했던 합의금은 총 1800만원. 없는 살림에 김씨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해결했다.

김씨는 "이날 이후 사고뭉치 소연이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도 차츰 내성적으로 변했다.

어느덧 지소연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얼마 안 되지만 각종 상금은 죄다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고 남동생에겐 아버지 마냥 엄한 누나가 됐다.

김씨는 "딸이 어느 날 집에 들렀다가 mp3 플레이어를 산 남동생을 불러다 '집 형편을 알면서도 그러느냐'며 심하게 야단쳤다"고 말하며 씁쓸히 웃었다.

김씨는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10년 가까이 홀로 두 남매를 키워 냈다."하루 12시간 넘게 미싱일을 해 번 돈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소연이를 뒷바라지했다"며 김씨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김씨는 돈이 없어 소연이에게 새 축구화를 못 사줬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여민다고 말했다.

"두 달만 되면 닳아 떨어지는 축구화가 정말 미웠다"며 말하는 김씨의 눈엔 오랜 세월 삭힌 눈물이 엿보였다.

매번 미싱공장 사장님에게 월급을 앞당겨 써 '가불인생'을 살았다는 김씨의 말투엔 8도 지방의 사투리가 배어 있었다.

미싱일을 하는 동료들이 전국의 여러 지방 출신들이라 그렇다는 김씨의 미소에서 그간 흘린 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지소연의 가정은 3년 전 기초생활수급 대상으로 지정됐고 1년 전부터는 다행히 정부가 지원하는 전세임대 혜택을 받아 매달 이자 12만 원만 내면 돼 한결 숨통이 트였다.

어머니 김씨는 2차, 3차 수술로 이어진 자궁암을 겨우 이겨냈지만, 미싱일을 하다 찾아온 허리디스크에 만성 근육통까지 겹쳐 두 달째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김씨의 얼굴만큼은 한없이 밝았다.쉴 새 없이 걸려오는 축하 전화와 언론사의 열띤 취재 요청에 이제야 딸의 유명세를 실감한다는 그녀는 몇 장 되지 않는 딸의 사진을 늘어놓으며 줄곧 입가에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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