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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자 MLB 리포트]꼬마 ‘추츠’ 루이스 필리스의 기둥이 되다
비로 얼룩진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지난 2008년 월드시리즈 취재 중에 가장 인상적인 선수를 꼽으라면 우승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무명 포수였습니다.
정규 시즌에 2할1푼9리를 친 전형적인 수비형에 신장도 작은 이 포수는 가을 잔치에서 단연 '숨겨진 영웅'으로 현지 필리스 팬들에겐 무한 애정을 받았습니다. LA 다저스와의 LNCS에서 5경기 3할1푼3리를 치며 살아난 그는 탬파베이와의 월드시리즈에서 5경기를 풀로 뛰며 3할3푼5리에 1홈런 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8번 타순에서 이런 성적을 거뒀으니 필리스가 레이스를 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2009년 가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습니다. NLDS에서 3할8리, NLCS에서 3할8푼5리, 그리고 WS에서 3할3푼3리를 치며 2홈런 9타점의 맹활약을 했습니다. 양키스에 패해 월드시리즈 2연패는 실패했지만 필리스 팬에게 그의 존재는 더 이상 키 작은 무명 포수가 아니라 당당한 그들의 최고 안방마님이었습니다.
파나마에서 태어난 이 선수의 이름은 카를로스 루이스, 그러나 필리스 팬과 동료들은 그를 '추츠(Chooch)'라는 애칭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필리스 팬들은 포스트 시즌 그의 활약을 떠올리면 옥토버 대신 '추츠-토버'라는 신조어를 사용합니다. 매년 가을 잔치가 벌어지는 10월이면 '추츠'의 맹활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찰리 매누엘 감독은 루이스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추츠는 항상 느긋하다. 늘 농담을 즐기고 함께 웃기를 원하는 선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대단히 신중하고 심각하기도 하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 투수진과 팀의 존경을 얻으면서 클럽하우스의 아주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무명의 포수 지망생에서 필리스의 간판 포수로 성장한 카를로스 루이스. 프로텍터에 새겨진 CHOOCH라는 애칭이 선명합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 요아킨 루이스가 그 자리에 서기까지는 참 오랜 세월과 좌절과 난관을 겪었습니다.
지난 1998년 필리스는 파나마 출신의 18세 소년과 계약했습니다. 당시 사이닝 보너스는 8000달러, 약 80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아보기까지 햇수로 9년이 걸렸습니다. 도미니카리그에서 2년을 보낸 후 2000년 '추츠'는 처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루키리그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2003년까지도 그는 포수와 외야수를 오가는 그저 수많은 마이너리그 선수 중의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는 2004년에 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필리스가 3라운드에 드래프트해 애지중지하던 미래의 포수 러스 제이콥슨이 마이너 더블A에서 도대체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자 그의 백업 포수이던 루이스에게 주전 자리가 임시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2할8푼4리에 17홈런이라는 프로 진출 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습니다. 루이스는 "내가 본격적으로 포수라는 포지션에 집중하고 적응하기 시작한 때였다. 포수라는 포지션에서 나의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모든 것을 집중했다."라고 회상합니다. 당시 그의 롤 모델은 이반 로드리게스였습니다.
마이너에서 9년을 보내며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빅리그가 아니었습니다. '추츠'는 2년을 더 마이너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참을성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루이스가 가을 잔치에서 유독 강한 면을 보이는 것은 그가 긴장하지 않고, 아니 남보다 덜 긴장하고 중요한 순간과 고비에도 평정심을 비교적 잘 유지하는 때문입니다. 기회가 오면 위축되기 보다는 오히려 더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마이너에서 오랜 고난과 인내의 시간을 통해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마이너에서 블로킹 수비와 투수 리드, 주자 견제와 송구 등 포수로서의 수비 능력 배양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늘 하나였습니다. '투수진과 최고의 호흡을 맞춰 상대 팀보다 1점을 덜 실점하는 경기를 하는 것.' 그는 상대 타자들은 물론 동료 투수들을 면밀히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백업 포수로라도 빅리그에 가기 위해서는 수비력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006년 제1회 WBC에 파나마 대표로 출전하기도 한 루이스는 그해 5월 주전의 부상으로 공백이 생기면서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콜업된 것입니다. 27경기, 2할6푼1리 3홈런 10타점의 성적은 준수했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마이너행 티켓이었습니다.
2007시즌을 앞두고 필리스 수뇌부는 아직 루이스가 준비가 덜 됐다고 여겼습니다. 수비력이나 공격력 모두 빅리그의 풀타임을 소화하기엔 아직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건 물론 오판이었지만 그 정도로 '추츠'는 아직 인정받지 못한 백업 포수 요원에 불과했습니다. 트리플A에서 100경기를 뛰며 3할7리 16홈런 69타점의 활약을 했지만 구단은 이 포수의 잠재력과 능력을 인정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만년 백업 요원이려니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혔던 것이지요.
필리스는 노장 포수 로드 바라하스를 영입했습니다. 그리고 바라하스가 부상으로 쓰러지자 백업인 크리스 코스테에게 주전 포수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포수 자리는 필리스의 구멍이었습니다. 결국 트리플A에서 뛰던 루이스가 불려갔고 그는 115경기를 뛰며 주전 포수로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팀이 그에게 원한 것은 수비와 투수와의 호흡이었습니다.
'추츠'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동시에 공격에서도 기대 이상의 기여도를 보였습니다. 총 774번의 수비 기회에서 단 2실책으로 99.7%의 수비율은 MLB 포수 중에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타석에서도 2할5푼9리에 6홈런 54타점의 성적을 올렸습니다. 필리스로서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미니 복권이 맞아 떨어진 셈이었습니다. 8번 타자 자리에서 그런 활약을 보이다니.
또한, 아주 특별한 퍼포먼스도 있었습니다. 6월26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추츠'는 더블 스틸을 감행해 홈을 훔쳤습니다. 필리스 선수로는 10년만이었고 필리스 포수로는 25년 만에 나온 홈스틸이었습니다. 내야수 출신인 루이스는 그 해 6도루를 기록할 정도로 포수치고는 여전히 빨랐습니다. 루이스의 출현과 함께 필리스는 NL 동부조 우승을 차지합니다. 필리스 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2008년 팀은 로드 바라하스를 떠나보냈고, 루이스는 필리스의 주전 포수가 됐습니다. 정규 시즌은 2할1푼9리로 타격은 부진했지만 '추츠의 가을 잔치'가 시작된 해였습니다. 탬파베이와의 WS 3차전이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맷 가자를 상대로 자신의 첫 WS 홈런을 치더니 9회말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쳤습니다. 시티즌스 뱅크파크의 홈팬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순간이었는데, NL 선수로는 WS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4번째 선수가 됐고 내야 안타로 결승타를 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필리스 역사상 최초의 WS 끝내기 안타 선수로도 기록됐습니다.
2009년에도 추츠는 99.6%의 수비율과 함께 2할5푼5리 9홈런의 활약으로 명실상부한 빅리그의 최고 포수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2010시즌에는 3할2리로 생애 첫 3할 타자가 됐고 파나마 출신 포수로는 최초로 퍼펙트게임을 잡아내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5월29일 플로리다 말린스 전에서 로이 할러데이와 퍼펙트게임을 합작한 루이스는 10월6일 NLDS 신시내티전에서 할러데이의 노히트노런 경기를 이뤄 한 시즌 두 번의 노히트 경기 포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올 시즌 필리스 타선이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는 가운데도 '추츠'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지켰습니다. 7월말까지 3할6푼4리로 NL 타격 1위를 달리기도 했고 올스타에도 선정됐습니다. 8월초 발을 다쳐 부상자 명단으로 갔지만 '추츠'는 올해 95경기에서 3할3푼5리 14홈런 58타점으로 심지어는 공격에서도 필리스의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최근 다시 복귀했지만 서서히 컨디션을 끌어올려 내년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대학도 포기하고 어머니를 설득해 시작한 프로 생활
카를로스 루이스가 빅리그까지 도달한 과정도 대단히 힘겨웠지만 실은 시작이 더 험난했습니다.
1997년 파나마를 방문한 필리스의 알렌 루이스라는 스카우트는 처음에는 '추츠'의 투수로서 잠재력을 보고 추천했는데 필리스 구단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2루수로 추천했던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1998년 샐 아고스티넬리가 필리스의 국제담당 스카우트 부장으로 취임했고 파나마 방문 중에 다시 한 번 '추츠'를 추천받았습니다. 명포수 출신의 아고스티넬리는 루이스의 강한 어깨와 팀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리더십, 쾌활한 성격 등을 보고는 포수에게 필요한 동작을 몇 가지 시켜봤습니다. 당연히 서툴렀지만 잠재력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계약금 8000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 이오센시아가 반대였습니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대학에 갓 입학해 체육학을 공부하던 아들 루이스가 고난과 불확실성의 연속일 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열정의 루이스는 어머니를 설득했고 결국 프로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1998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도미니칸 캠프에 처음 도착한 날을 잊지 못합니다. 캠프에 도착하자 전체 선수 중에 가장 체구가 작은 것이 자신이었습니다. 도착한 첫 날 경기 전 훈련에서 루이스는 공중에 높이 뜬 공을 잡으려다 뒤로 넘어졌고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실은 정식으로 포수 마스크를 쓴 첫 날이었습니다.
문화도 풍습도 음식도 모두 다른 도미니칸리그에서 2년을 버텨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또 한 번 흡사한 적응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도미니카에서는 그마나 언어라도 통했지만 루이스는 영어는 전혀 못했습니다. 오로지 쉼 없는 훈련과 도전으로 생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야구의 길로 뛰어는 '추츠'는 이제 메이저리그에서도 첫 손에 인정받는 포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필리스의 간판 포수로 자리 잡은 그의 훌륭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꿈과 노력이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코치가 높이 띄운 공을 잡지도 못하고 넘어졌던 첫 날의 사건 이후 그는 코치를 졸라 몇 달 동안 매일 매일 뜬공을 수도 없이 잡았습니다. 이제는 어떤 뜬 공도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코치는 지겹도록 공을 공중으로 날려야 했습니다.
2000년 봄 미국에 도착해 캠프 첫 날 믹 빌마이너라는 순회 포수 코디네이터와의 만남도 극적이었습니다. 빌마이너는 영어를 전혀 못하지만 뚫어지는 논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귀를 기울이는 이 어린 외국인 포수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가 포수 자세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슬쩍 밀었더니 루이스는 뒤로 발랑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밸런스가 전혀 안 잡힌, 한 마디로 기본기가 태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간 루이스는 빌마이어의 분신처럼 주변을 맴돌며 포수의 기본기를 배웠습니다. 스페인어까지 배워가면서 그를 가르친 빌마이너 코치의 헌신도 잊을 수 없습니다.
기록에 보면 '추츠' 루이스는 178cm에 92kg으로 나와 있습니다.
92kg은 맞을지 모르지만 178cm는 절대 아닙니다. 2008 월드시리즈 취재 중 곁에 섰을 때 비슷했던 느낌으로 봐서 172,3cm 정도. 프로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깡마르기까지 했으니 체격만으로도 이미 그는 구단 관계자들의 눈 밖이었습니다.
만약 루이스가 꿈과 도전의 길 대신에 어머니가 권한 길을 갔더라면 아마 지금쯤 파나마의 한 체육 교사로 일하고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것도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꿈과 도전으로 이룬 메이저리그 포수 카를로프 '추츠' 루이스의 현재의 삶도 대단히 멋있습니다.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정규 시즌에 2할1푼9리를 친 전형적인 수비형에 신장도 작은 이 포수는 가을 잔치에서 단연 '숨겨진 영웅'으로 현지 필리스 팬들에겐 무한 애정을 받았습니다. LA 다저스와의 LNCS에서 5경기 3할1푼3리를 치며 살아난 그는 탬파베이와의 월드시리즈에서 5경기를 풀로 뛰며 3할3푼5리에 1홈런 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8번 타순에서 이런 성적을 거뒀으니 필리스가 레이스를 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2009년 가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습니다. NLDS에서 3할8리, NLCS에서 3할8푼5리, 그리고 WS에서 3할3푼3리를 치며 2홈런 9타점의 맹활약을 했습니다. 양키스에 패해 월드시리즈 2연패는 실패했지만 필리스 팬에게 그의 존재는 더 이상 키 작은 무명 포수가 아니라 당당한 그들의 최고 안방마님이었습니다.
파나마에서 태어난 이 선수의 이름은 카를로스 루이스, 그러나 필리스 팬과 동료들은 그를 '추츠(Chooch)'라는 애칭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필리스 팬들은 포스트 시즌 그의 활약을 떠올리면 옥토버 대신 '추츠-토버'라는 신조어를 사용합니다. 매년 가을 잔치가 벌어지는 10월이면 '추츠'의 맹활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찰리 매누엘 감독은 루이스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추츠는 항상 느긋하다. 늘 농담을 즐기고 함께 웃기를 원하는 선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대단히 신중하고 심각하기도 하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 투수진과 팀의 존경을 얻으면서 클럽하우스의 아주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 요아킨 루이스가 그 자리에 서기까지는 참 오랜 세월과 좌절과 난관을 겪었습니다.
지난 1998년 필리스는 파나마 출신의 18세 소년과 계약했습니다. 당시 사이닝 보너스는 8000달러, 약 80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아보기까지 햇수로 9년이 걸렸습니다. 도미니카리그에서 2년을 보낸 후 2000년 '추츠'는 처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루키리그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2003년까지도 그는 포수와 외야수를 오가는 그저 수많은 마이너리그 선수 중의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는 2004년에 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필리스가 3라운드에 드래프트해 애지중지하던 미래의 포수 러스 제이콥슨이 마이너 더블A에서 도대체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자 그의 백업 포수이던 루이스에게 주전 자리가 임시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2할8푼4리에 17홈런이라는 프로 진출 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습니다. 루이스는 "내가 본격적으로 포수라는 포지션에 집중하고 적응하기 시작한 때였다. 포수라는 포지션에서 나의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모든 것을 집중했다."라고 회상합니다. 당시 그의 롤 모델은 이반 로드리게스였습니다.
마이너에서 9년을 보내며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빅리그가 아니었습니다. '추츠'는 2년을 더 마이너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참을성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루이스가 가을 잔치에서 유독 강한 면을 보이는 것은 그가 긴장하지 않고, 아니 남보다 덜 긴장하고 중요한 순간과 고비에도 평정심을 비교적 잘 유지하는 때문입니다. 기회가 오면 위축되기 보다는 오히려 더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마이너에서 오랜 고난과 인내의 시간을 통해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마이너에서 블로킹 수비와 투수 리드, 주자 견제와 송구 등 포수로서의 수비 능력 배양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늘 하나였습니다. '투수진과 최고의 호흡을 맞춰 상대 팀보다 1점을 덜 실점하는 경기를 하는 것.' 그는 상대 타자들은 물론 동료 투수들을 면밀히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백업 포수로라도 빅리그에 가기 위해서는 수비력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006년 제1회 WBC에 파나마 대표로 출전하기도 한 루이스는 그해 5월 주전의 부상으로 공백이 생기면서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콜업된 것입니다. 27경기, 2할6푼1리 3홈런 10타점의 성적은 준수했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마이너행 티켓이었습니다.
2007시즌을 앞두고 필리스 수뇌부는 아직 루이스가 준비가 덜 됐다고 여겼습니다. 수비력이나 공격력 모두 빅리그의 풀타임을 소화하기엔 아직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건 물론 오판이었지만 그 정도로 '추츠'는 아직 인정받지 못한 백업 포수 요원에 불과했습니다. 트리플A에서 100경기를 뛰며 3할7리 16홈런 69타점의 활약을 했지만 구단은 이 포수의 잠재력과 능력을 인정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만년 백업 요원이려니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혔던 것이지요.
필리스는 노장 포수 로드 바라하스를 영입했습니다. 그리고 바라하스가 부상으로 쓰러지자 백업인 크리스 코스테에게 주전 포수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포수 자리는 필리스의 구멍이었습니다. 결국 트리플A에서 뛰던 루이스가 불려갔고 그는 115경기를 뛰며 주전 포수로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팀이 그에게 원한 것은 수비와 투수와의 호흡이었습니다.
'추츠'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동시에 공격에서도 기대 이상의 기여도를 보였습니다. 총 774번의 수비 기회에서 단 2실책으로 99.7%의 수비율은 MLB 포수 중에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타석에서도 2할5푼9리에 6홈런 54타점의 성적을 올렸습니다. 필리스로서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미니 복권이 맞아 떨어진 셈이었습니다. 8번 타자 자리에서 그런 활약을 보이다니.
또한, 아주 특별한 퍼포먼스도 있었습니다. 6월26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추츠'는 더블 스틸을 감행해 홈을 훔쳤습니다. 필리스 선수로는 10년만이었고 필리스 포수로는 25년 만에 나온 홈스틸이었습니다. 내야수 출신인 루이스는 그 해 6도루를 기록할 정도로 포수치고는 여전히 빨랐습니다. 루이스의 출현과 함께 필리스는 NL 동부조 우승을 차지합니다. 필리스 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2008년 팀은 로드 바라하스를 떠나보냈고, 루이스는 필리스의 주전 포수가 됐습니다. 정규 시즌은 2할1푼9리로 타격은 부진했지만 '추츠의 가을 잔치'가 시작된 해였습니다. 탬파베이와의 WS 3차전이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맷 가자를 상대로 자신의 첫 WS 홈런을 치더니 9회말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쳤습니다. 시티즌스 뱅크파크의 홈팬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순간이었는데, NL 선수로는 WS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4번째 선수가 됐고 내야 안타로 결승타를 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필리스 역사상 최초의 WS 끝내기 안타 선수로도 기록됐습니다.
2009년에도 추츠는 99.6%의 수비율과 함께 2할5푼5리 9홈런의 활약으로 명실상부한 빅리그의 최고 포수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2010시즌에는 3할2리로 생애 첫 3할 타자가 됐고 파나마 출신 포수로는 최초로 퍼펙트게임을 잡아내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5월29일 플로리다 말린스 전에서 로이 할러데이와 퍼펙트게임을 합작한 루이스는 10월6일 NLDS 신시내티전에서 할러데이의 노히트노런 경기를 이뤄 한 시즌 두 번의 노히트 경기 포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올 시즌 필리스 타선이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는 가운데도 '추츠'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지켰습니다. 7월말까지 3할6푼4리로 NL 타격 1위를 달리기도 했고 올스타에도 선정됐습니다. 8월초 발을 다쳐 부상자 명단으로 갔지만 '추츠'는 올해 95경기에서 3할3푼5리 14홈런 58타점으로 심지어는 공격에서도 필리스의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최근 다시 복귀했지만 서서히 컨디션을 끌어올려 내년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대학도 포기하고 어머니를 설득해 시작한 프로 생활
카를로스 루이스가 빅리그까지 도달한 과정도 대단히 힘겨웠지만 실은 시작이 더 험난했습니다.
1997년 파나마를 방문한 필리스의 알렌 루이스라는 스카우트는 처음에는 '추츠'의 투수로서 잠재력을 보고 추천했는데 필리스 구단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2루수로 추천했던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1998년 샐 아고스티넬리가 필리스의 국제담당 스카우트 부장으로 취임했고 파나마 방문 중에 다시 한 번 '추츠'를 추천받았습니다. 명포수 출신의 아고스티넬리는 루이스의 강한 어깨와 팀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리더십, 쾌활한 성격 등을 보고는 포수에게 필요한 동작을 몇 가지 시켜봤습니다. 당연히 서툴렀지만 잠재력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계약금 8000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 이오센시아가 반대였습니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대학에 갓 입학해 체육학을 공부하던 아들 루이스가 고난과 불확실성의 연속일 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열정의 루이스는 어머니를 설득했고 결국 프로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1998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도미니칸 캠프에 처음 도착한 날을 잊지 못합니다. 캠프에 도착하자 전체 선수 중에 가장 체구가 작은 것이 자신이었습니다. 도착한 첫 날 경기 전 훈련에서 루이스는 공중에 높이 뜬 공을 잡으려다 뒤로 넘어졌고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실은 정식으로 포수 마스크를 쓴 첫 날이었습니다.
문화도 풍습도 음식도 모두 다른 도미니칸리그에서 2년을 버텨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또 한 번 흡사한 적응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도미니카에서는 그마나 언어라도 통했지만 루이스는 영어는 전혀 못했습니다. 오로지 쉼 없는 훈련과 도전으로 생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야구의 길로 뛰어는 '추츠'는 이제 메이저리그에서도 첫 손에 인정받는 포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필리스의 간판 포수로 자리 잡은 그의 훌륭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꿈과 노력이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코치가 높이 띄운 공을 잡지도 못하고 넘어졌던 첫 날의 사건 이후 그는 코치를 졸라 몇 달 동안 매일 매일 뜬공을 수도 없이 잡았습니다. 이제는 어떤 뜬 공도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코치는 지겹도록 공을 공중으로 날려야 했습니다.
2000년 봄 미국에 도착해 캠프 첫 날 믹 빌마이너라는 순회 포수 코디네이터와의 만남도 극적이었습니다. 빌마이너는 영어를 전혀 못하지만 뚫어지는 논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귀를 기울이는 이 어린 외국인 포수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가 포수 자세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슬쩍 밀었더니 루이스는 뒤로 발랑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밸런스가 전혀 안 잡힌, 한 마디로 기본기가 태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간 루이스는 빌마이어의 분신처럼 주변을 맴돌며 포수의 기본기를 배웠습니다. 스페인어까지 배워가면서 그를 가르친 빌마이너 코치의 헌신도 잊을 수 없습니다.
기록에 보면 '추츠' 루이스는 178cm에 92kg으로 나와 있습니다.
92kg은 맞을지 모르지만 178cm는 절대 아닙니다. 2008 월드시리즈 취재 중 곁에 섰을 때 비슷했던 느낌으로 봐서 172,3cm 정도. 프로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깡마르기까지 했으니 체격만으로도 이미 그는 구단 관계자들의 눈 밖이었습니다.
만약 루이스가 꿈과 도전의 길 대신에 어머니가 권한 길을 갔더라면 아마 지금쯤 파나마의 한 체육 교사로 일하고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것도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꿈과 도전으로 이룬 메이저리그 포수 카를로프 '추츠' 루이스의 현재의 삶도 대단히 멋있습니다.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