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정의 베이스볼 토크] 15년 선수생활 마감한 손인호, 상무 코치로 새 출발

조회수 2012. 12. 13. 11: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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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대전 원정경기 5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장, 첫 타석에서 1루수 직선타로 물러난데 이어 3회 선발 송창식의 초구를 받아쳐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난 것이 손인호(37.LG)의 프로 마지막 타석이 되고 말았다. 경남고-고려대를 거쳐 1998년 드래프트 2차 1번으로 롯데에 입단, 주장 완장까지 했으나 2007년 박석진과 LG에 트레이드 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손인호는 올 시즌 종료 직 후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선수라는 통보를 받았다.6월 중순 4경기에 출전 8타수 무안타의 기록만 있을 뿐 올해 대부분의 시간을 2군에서 머무는데 그쳤던 터라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권리 행사 대신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이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팀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서른여덟의 노장을 받아주겠다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은퇴식은 커녕 소리 소문 없이 선수 인생을 접어야 했던 손인호은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고 유일한 취미 낚시로 복잡한 심정을 정리했다.

★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을 수 있어 다행

지난 달 21일 손인호는 급히 대구로 향하는 KTX를 잡아탔다. 아시아선수권 대회 참가를 앞두고 프로와 아마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의 코치로 선임된 박치왕(상무)감독의 호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감독님이 뭐하고 지내냐며 연락을 하셨어요. 그냥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야구 접을 거냐며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자고 하셨어요."대표팀 훈련을 마감한 뒤 박치왕 감독은 숙소 근처 모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고 넥센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허문회 코치의 후임으로 그를 추천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뜻밖의 제안에 손인호는 고개를 조아리며 희망을 건졌다."솔직히 말하면 프로 팀에서 코치 들어 왔다면 망설였을 겁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 너무 고맙죠. 제가 지냈던 팀이라 분위기도 잘 알고 있고 아직 국군체육 부대에서 최종 허락을 받아야 한다지만 박 감독님이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신다고 하니 잘 되지 않을까 싶네요."손인호는 '2001년 입대했을 당시에도 저렇게 맺고 끝는 것이 분명했던 분' 이라며 짧고 간결하게 코치영입의사를 밝히고 자리를 떠난 박치왕 감독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특히 수많은 선수들이 거쳐 간 상무 출신 가운데 자신을 콕 집어 불러줬다는 점에 남다른 의미가 아닐 수 없었다."야구는 제 맘처럼 되지 못했어도 인생을 헛되이 살진 않은 거 같네요." 오랜만에 그는 활짝 웃었다.

★ 부족함이 더 많았던 야구천재

좌투좌타 손인호는 일찍이 경남고 시절부터 투타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유망주로 평가받았고 고려대 진학 이후엔 김동주와 나란히 중심타선을 이끌며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다. 1998년 신인지명에서 2차 지명 전체 1순위로 야수 중 최고 계약금 1억 8천만 원을 받는 등 고향 팀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을 때까지만 해도 야구인생은 순탄했다.그러나 입단 초 좌투수 부족에 허덕이던 팀 상황에서 그는 투수 전향을 권유받았다. 고교시절 봉황대기 우수 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투수로서의 자질 또한 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외야수의 길을 강력하게 희망했고 결국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로 돌아오는 등 어수선했고 데뷔 이후 3년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하며 대타요원으로 나서는데 그쳤고 평균 타율 2할 대 중반에 불과했다.이후 상무에 입대 꾸준히 경기 출장 경험을 쌓아 제대 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롯데 주전 외야수로 자릴 잡았다. 2004년엔 2할 8푼 4리 5홈런 42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시즌 최고성적을 기록하는 등 잠시 전성기를 누리는 듯 했으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천재'라는 수식어에 비해 결과는 미약했다.

★ 정들었던 롯데를 떠나

서른을 넘긴 2006년엔 투표를 통해 주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당시 최고참 가득염을 비롯해 박현승 최기문 등 유력 후보 선배들을 제치고 그는 온화하고 밝은 성격을 인정받았던 것.입단 한 이래 준우승과 4강에 한 번 진입한 것이 전부였던 만큼 팀의 화합을 이끌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정작 주장 완장을 찬 그 해 80경기출장 타율 2할1푼 대에 그치는 부진을 보이며 팀 내 입지를 잃었고 2007년 7월엔 LG 내야수 최길성,외야수 최만호의 반대급부로 박석진 투수와 함께 LG로 2대2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왼손 대타요원이 절실했던 LG의 부름에 10년의 세월을 보냈던 부산을 떠나야 했었기에 서운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적 다음해 그는 77경기에 나서며 외야 선발 주전 선수 결장의 빈 자리를 메웠다. 2010년엔 62타수 20안타 2홈런 12타점 타율 3할 2푼 3리로 높은 대타 성공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선수들의 틈 사이에 하나 둘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선수들을 극복하지 못한 채 올해 잠깐 1군에 모습을 보였을 뿐 2군에 머물다 결국 본의 아닌 은퇴를 맞이하게 됐다."2군에서 어린 선수들과 함께 하는 것이 처음엔 자존심도 상했지만 어쩌겠어요. 제가 부족했는데 어떻게든 버티며 1.2년 정도 더 선수로 남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맘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 변함없이 그라운드 누비는 친구들 부러워

팀 내에서 가장 친했던 동갑내기 조인성이 SK로 이적하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거의 없었다는 손인호는 그에게 청첩장까지 건넨 조인성이 몹시 부럽다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이호준하고도 동기인데 그 친구 애가 셋이더군요(웃음) 야구선수의 경우는 20대 후반 정도엔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은 거 같아요. 저도 어서 짝을 찾아야 할텐데.. 전 최동수 형이 가장 부러워요. 그렇게 오랫동안 현역에서 뛰는 거 보면."손인호는 자신도 젊은 시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베테랑 선배들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며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본의 아니게 2군에서 생활을 오래 하면서 젊은 선수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시행착오나 실수 등을 많이 봐왔어요. 그런 경험을 살려 상무에 입대한 선수들이 더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와줄래요."12월 1일자로 상무 타격 코치로 정식 부임한 그는 스스로 못 다 이룬 선수로서의 꿈을 후배들에게 전수해 주겠겠노라 다짐했다.한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만개하지 못한 채 조용히 현역을 물러나야 했던 아픔을 훌훌 털어 내길 바라며 모쪼록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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