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정의 베이스볼 토크]혹시 야구선수 여정호를 아시나요?

조회수 2012. 1. 22. 15: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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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프로야구 신인선수교육엔 예년에 비해 참가 인원이 20% 이상 증가했다. NC 다이노스가 가세했기 때문이다. 경찰과 상무를 거친 미지명선수 5명을 비롯해 신인지명회의에서 선발한 17명 그리고 신고선수 15명에 이르기까지 전체인원 62명 가운데 절반을 훌쩍 넘기는 인원이 교육에 참가했다. 한 번도 국내 프로팀에 적을 두지 않았던 선수가 37명이라는 걸 의미한다."오늘 온 선수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선수요? 스물여덟인가 아홉이라고 들었는데 진짜 신인 맞나요?"모 구단 대졸 신인에게 최고령 참가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자, 이름은 모르지만 한 명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1984년 생으로 우리 나이로 29살 좌완 여정호(余政鎬)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NC 다이노스가 9월 5일부터 사흘간 창원시 마산 야구장에서 개최한 2차 트라이아웃에 참가, 22명의 합격자에 이름을 올리며 꿈에 그리던 프로선수가 되었다.

▶ 어디도 나를 원하지 않았다

184cm 87kg의 신체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얼굴이 갸름하고 살이 없는 편이라 실제로는 다소 왜소해 보이는 편인 여정호는 부산 토박이로 중학교 진학 이후 뒤늦게 야구에 입문, 부산상고와 2년제 제주 한라대를 거쳐 동국대에 편입하며 프로지명의 기회를 노렸으나 미지명됐다. 그러나 그는 포기 하지 않았다.여러 구단을 기웃거리며 신고 선수 테스트에 참가하고 우리 히어로즈(현. 넥센)의 배팅볼 투수로 일하며 선수로 써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 우리 히어로즈에 일본인 투수 사이드암 다카쓰 신고를 영입하는데 다리를 놓았던 조동윤 에이전트의 권유로 그는 일본 지바롯데 테스트에 참가했다.그런데 의욕이 과했던 탓에 현장에서 팔꿈치 이상을 감지, 제대로 던져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작년 말 보스턴 레드삭스 사령탑에 오른 보비 발렌타인 감독이 당시 테스트 현장을 방문한 것이 오버페이스 하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다며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감독님이 보고 계신다는 걸 느끼는 순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무리를 했던 거 같아요. '뚝'하는 소리가 나더니 도저히 아파서 팔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오죽하면 안되겠다 싶어 제 발로 마운드를 내려왔겠어요? 곧 한국으로 돌아와 검사했는데 인대파열이라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지루한 재활의 시대를 맞이한 거죠."

▶야구는 삶의 전부, 부상도 나를 막을 순 없다

중학교때 처음 야구를 처음 접하고 늘 그는 남보다 뒤처져 있다는 조급함을 안고 마운드에 올랐다. 부산상고 졸업 후 그는 제주 한라대에 진학 했고 2년 후 동국대에 편입, 프로 지명의 기대를 품었지만 항상 말썽을 일으킨 팔꿈치 통증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했다. 또한 허리와 어깨 등 잔부상을 안고 지냈다.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건 심수창(넥센)의 삼촌이자 지금은 작고한 심형식 선생님이다."동대문야구장에서 처음 심선생님을 만났는데 팔꿈치가 아프다는 걸 아시고는 봐주시겠다고 해서 냉큼 달려갔죠. 팔꿈치가 아픈 건 투구 폼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교정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졌어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대장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만약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처럼 이렇기 오랫동안 방황하진 않았을 겁니다. 저희 부모님과도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저희 가족이 많이 슬퍼하고 가슴 아파했죠. 다시 혼자 운동을 하려니까 막막했어요. 그런 가운데 결국 수술까지 하게 되었고 근 2-3년 동안 재활에 시간을 쏟아 부었죠."재활을 하며 공익근무를 병행하던 시기 그는 발목이 뭉개지는 사고를 당해 뼈가 부러져 수술을 두 번이나 받는 악몽을 겪어야 했다."이미 팔꿈치 수술만 3번에 발목까지 다치고.... 그런데도 부모님은 오히려 기회로 삼으라며 의지를 꺾지 말라고 하셨어요. 자식이 원하는 꿈을 이뤄주시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실 그게 어디 쉽나요?"여정호의 부모님은 모두 운동선수 출신이다. 아버지는 배드민턴. 어머니는 육상과 핸드볼 선수로 뛰었던 경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라운드를 누비지 못하고 병실에 누워 있는 아들이 더 익숙할 정도로 수술과 재활의 반복은 그를 점점 더 지치게 했다.

▶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야구를 포기 하려던 그 때 한줄기 희망을 안겨준 건 TV프로그램에 등장한 박찬호 선수였다."성공한 선배님이라 저처럼 힘들고 지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맘고생도 심하고 타국에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 받았어요. 물론 저만큼 다친 건 아니지만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어요. 그 날 이후 다시 야구에 미치기 시작했죠. 빨리 공을 던져야겠다는 마음 뿐이었어요."여정호는 굳이 한국이 아니라도 야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 찾아가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사비를 털어 미국으로 날아가 여러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메이저리그 몇 군데도 봤지만 제 수준보다 훨씬 높아 떨어졌어요. 그러다 독립리그 팀 테스트를 봤는데 합격했어요. 그래서 하와이로 날아갔죠."2011년 1월 그는 자신을 받아주겠다는 하와이 나코아 이카이카 라는 팀의 유니폼을 입었다. 물론 처음엔 환경적응에 실패하고 고전했다."스트라이크 죤도 심판의 판정 기준도 모두 낯설었죠. 또 우리와 다르게 타자들이 파워가 있어 맞으면 넘어가니까 그걸 지레 겁먹었어요." 임 중간 원포인트로 나섰던 그를 묵묵히 지켜보던 감독은 면담을 원했고 '이런 식으로 하면 방출할 것이니까 똑바로 하라'는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위기의식이 느껴졌고 자존심도 상했죠. 그런데 투수코치가 제게 딴 생각 말고 무조건 홈플레이트 한 가운데 포수만 보고 던지라는 충고를 해줬어요. 다음 날 무턱대고 해봤죠. 그런데 타자가 연신 파울만 치더군요. 그때 내 볼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시즌 막판엔 마무리로 나서면서 인터뷰도 하고 나름대로 잘했어요(웃음)"

▶ 한국야구를 밖에서 바라보며

의사소통이 힘들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그는 하와이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물론 먹고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급여로 늘 생활고를 감수해야했지만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점과 미국 야구를 경험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찾았다." 미국이 야구 선진국이지만 새삼스럽게 감동 받은 건 즐긴다는 점이었어요. 우리나라는 뭔가에 쫒기 듯 하는데 비해 거긴 야구 자체에 푹 빠져 재미를 추구하는 거 같았어요. 또 인종차별이 있을 거라 여기실 테지만 저는 말만 통하지 않았을 뿐이지 친하게 잘 지냈어요. 말이 통하지 않아 오해를 사는 일도 있었지만 핸드폰의 번역 기능을 상용해 대화를 나눴죠. 나중엔 선수들 뿐 만 아니라 감독 코치와도 친해졌죠."그는 수훈선수로 인터뷰에 나서기도 했다. 아무래도 한국인이다 보니 자국의 야구에 대한 소개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는 등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으니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실제로 한국야구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한국이 그리워졌어요.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말이죠. 언젠가는 꼭 한국무대에 서겠다고 다짐했죠."

▶ 마침내 꿈을 이루다

NC 창단 뒤 트라이아웃이 개최된다는 소식에 그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 여겼다. "2차 드래프트 테스트 당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해 마산구장으로 달려갔어요. 비행기 안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컨디션도 별로였는데 다행히 144,145km대 구속이 나왔어요. 미국에서도 92,93마일 정도 나왔거든요. 부모님이 테스트 현장에서 지켜보셨어요. 마운드에 서 있는 모습을 대학 졸업 후 5년 만에 제 피칭을 보신 겁니다. 많이 좋아하셨고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그는 막연하게 합격을 예감했다. 하지만 진짜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절실함으로 자신을 채찍질한다.

"항상 대범하게 아들을 대해주시며 용기 잃지 않도록 도와주신 어머니, 무뚝뚝한 아들 성격에 대해 한 번도 서운하다 하시지 않고 묵묵히 뒷바라지 해주신 아버지, 또 항상 나 때문에 항상 피해보고 소외된 누나 모두에게 미안하고 죄송하고 고마워요. 잘 돼서 수술하느라 빌렸던 돈도 갚고 빚도 청산해야죠."

강진-제주로 이어진 70 여일 간의 긴 마무리 캠프 기간 동안 그는 잠시 밸런스가 무너져 맘고생도 했고 또 겨우 이전의 폼을 찾는 등 여전히 완벽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도 미국 애리조나 투산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건 김경문 감독에게 눈도장을 받았다는 것이 아닐까?"항상 뚜렷한 소신과 뚝심 그리고 허슬플레이를 강조하시는 김경문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행복하고 영광스러워요. 직구, 커브, 슬라이더 투심까지는 어느 정도 던지는데 미국에서 팀 동료에게 전수 받은 체인지업은 아직 50-60% 정도밖엔 완성되지 않았거든요. 캠프기간동안 몸에 익혀 돌아올 계획이에요.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지명 받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나이 따위는 잊고 처음부터 하나 하나 배워 돌아올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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