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역사가 기억할 FA, '한국의 커트 플러드' 이도형 [조인식의 와일드피치]

2013. 11. 13.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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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조인식 기자] 메이저리그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리그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사건에는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항상 있었다. 커트 플러드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다.

중견수로 1960년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외야를 책임졌던 플러드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올스타에도 3번이나 선정됐고, 1963년부터 7년 연속 내셔널리그 골드글러브도 따냈다. 세인트루이스 유니폼을 입고 때려낸 1853개의 안타는 카디널스 프랜차이즈 통산 9위에 해당되는 기록이다.

하지만 플러드는 자신이 올린 성적보다 그 외적인 부분에서 더 크게 이름을 남겼다. 명예의 전당에는 갈 수 없는 통산 성적이었지만, 플러드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그 어떤 선수보다 명예로운 방법으로 야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플러드는 당시 메이저리그에 남아 있던 '보류조항'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보류조항에 따라 선수는 구단이 자신을 트레이드 혹은 방출하지 않으면 다른 팀에서 뛸 수 없었다. FA 제도가 있기 전의 일이었다.

리그 올스타급 스타였던 플러드는 굳이 그래야만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10만 달러 수준의 연봉을 받는 고액연봉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러드는 구단의 횡포에 맞서 1970년 1월 독점금지법 위반이라는 논리로 리그와 보위 쿤 커미셔너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플러드의 패배였다. 소송은 2년이 지난 1972년에 리그의 승리로 끝났고, 이 과정에서 구단의 미움을 받은 플러드는 1970 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이후 워싱턴 세네터스로 트레이드 되어 1971년에 단 13경기만 뛰고 은퇴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플러드의 패배였지만, 역사는 플러드를 승자로 기억하고 있다. 플러드의 희생은 보류조항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게 했고, 메이저리그에는 1975년부터 FA 제도가 도입됐다. 자신이 FA의 혜택을 입지는 못했지만, 플러드는 FA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다. FA 제도가 탄생한 뒤에 있었던 일이지만, 이도형은 한국의 커트 플러드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 OB 베어스에 입단해 한화 이글스를 거친 이도형은 FA 자격을 채운 2010 시즌 종료 후 FA를 신청했으나, 어느 팀의 부름도 받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여기가 끝이었다면, 이도형 역시 과거와 미래의 수많은 FA 미아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형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도형은 야구규약 161조 6항에 명시된 '1월15일까지 어떠한 구단과도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FA 선수는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된다. 단, FA 선수로 공시돼 자유계약선수가 된 경우 그 선수는 당해년도 어느 구단과도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조항의 개정을 위해 서울 지방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다.

긴 싸움 끝에 이도형은 제도를 바꿨다. 플러드처럼 이번에도 본인이 수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1월 15일 이후에도 FA 선수들이 구단과 계약할 수 있다. 매년 논란이 되고 있는 FA 미아 발생을 방지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한국의 FA 제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부담스런 보상규정(전년도 연봉의 200%와 보호선수 20인 외 1명 혹은 전년도 연봉의 300%)으로 인해 대어급이 아닌 선수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계약 선수가 되기 쉽지 않다. FA를 등급별로 분류해 보상 폭을 달리하거나 메이저리그의 퀄리파잉 오퍼와 비슷한 규정을 두는 것이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아직까지 완벽하지 않은 FA 제도지만, 여기까지 오게 만든 시도를 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도형의 용기는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외롭게 싸운 이도형의 결단과 행동은 그 어떤 FA 대박보다 값졌다. 그저 장타 한 방을 갖췄던 선수 정도로 기억될 것 같았던 이도형은 멀리 내다보고 날린 인생 최고의 장타로 야구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도형의 현역 시절 모습.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DB]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press@mydaily.co.kr- NO.1 뉴미디어 실시간 뉴스 마이데일리( www.mydaily.co.kr) 저작권자 ⓒ 마이데일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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