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성의 저니맨⑧]선수협, 그 잊혀진 이름들

정철우 2010. 1. 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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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열린 선수협회 이사회 모습.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우리가 송진우(은퇴.한화 코치 연수 예정)를 여전히 '회장님'이라 부르는 건 그가 초대 선수협회 회장을 맡았기 때문이다.구단의 강한 협박과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신의를 지켜낸 상징적 인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⑧송진우 뿐 아니다. 양준혁 마해영 최태원 박정태 김재현 심정수 등 당시의 주축 멤버들은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그러나 그 때 선수협회를 만들고 끝까지 지켜낸 사람은 그들 스타 플레이어들만은 아니었다.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들도 함께 남아 선수협회를 지켜냈다.어쩌면 그들의 공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야구는 할 수 있었던 특급 수들과는 달리 진짜 야구 인생을 걸고 도전했었기 때문이다. 최익성은 지금도 그들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하며 이야기하는 몇 안되는 야구인이다.최익성은 최근 선수협회가 자신에게 1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그때 끝까지 남아 싸웠던 잊혀진 선수들을 찾아 감사패를 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1999시즌 우승 후 어깨 치료를 위해 일본을 다녀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무심코 집어든 신문에서 놀라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프로야구 노조 분쟁'이라는 검은 글씨의 제목.

처음엔 그렇게 큰 일인 줄 몰랐다. 절친했던 양준혁 선배가 도와달라기에 그러겠다고 했었을 뿐이다.

예상보다 파장이 컸다. 구단 사무실에 들어가자 선수단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구단은 구단대로 선수들을 갈라 놓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난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았다. 늘 하던대로 행동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해 준 야구, 그 야구를 위해서, 후배를 위해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선수들은 날 따랐고 고참들은 한발 물러서 있었다. 중간쯤 위치였던 내가 결국 리더가 됐다.

후배들은 매일 내게 연락을 했고 나를 중심으로 뭉쳐 행동했다. 그리고 총회 당일. 우리는 집결지에 모여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려 했다.

먼저 선배들이 막아섰다. 내게 크게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네가 뭔대 애들을 이끌고 가냐. 한화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설치냐. 네가 우리 팀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냐."

난 대답했다. "우리팀, 그리고 선배들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한 야구 선배,후배가 있다면 언 언제라도 이렇게 행동할겁니다. 이해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선배도 길을 터주었다. 우린 그제서야 버스에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버스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었다. 감독님은 버스에 올라타 성난 목소리로 "이제 나랑 야구 안하겠다는 포기 각서를 쓰면 보내주겠다"고 외치셨다.

선수들의 얼굴에서 주저하는 빛이 역력했다. 난 앞으로 나갔다. 각서를 쓰겠다고 했다. 감독님은 크게 놀라셨지만 난 각서에 지장을 찍고 버스에서 내렸다.

결국 버스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서울로 가려했던 후배들을 이끌고 총회장까지 갔다. 그땐 정말 이대로 야구를 못하게 되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동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막상 총회장에 가보니 실망스러웠다. 선수간 갈등,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선수들을 위한 단체인데 선수들 사이에서 분란이 크게 불거졌다. 결국 전체가 아닌 일부 선수만으로 선수협회가 출범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생활을 말할 수 없을만큼 힘들고 참담했다. 역삼동의 한 여관에서 단체 생활을 했는데 지도부를 제외하면 밖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머지 선수들은 구단과 가족의 끊임없는 설득에 흔들려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네가 어떻게 이자리까지 왔는데 그걸 포기하느냐. 넌 다른 선수와는 다르다. 입장이 다르니까 순순히 고개 숙이고 야구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셨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 "어머니, 제가 저를 버리고 나를 속이면 야구 계속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는 그 이후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계속되며 하나 둘 씩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그런 선수들을 배신자라고 손가락질 했다.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용기내어 함께 했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조현 홍우태 박재용 정영규 등 적지 않은 선수들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선수협회를 지켜냈다.

그렇게 고생한 선수들을 모두 배신자를 만들 순 없었다. 난 지도부를 찾아갔다. "선배님, 자신 있으면 대표 8명만 남고 모두 보내줍시다."

실제로 그 선수들은 선수협 사태가 종료되면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선수들은 달랐다. 더 이상 버티면 야구 선수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었다. 또 참석하지 않았던 선수들에게 누군가 우리의 고통을 전해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일부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선수들이 더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정말 야구를 그만 둘 각오였다. 그렇다면 몇명이 더 남아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 논쟁을 거치며 난 내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했다. 갑자기 야구가 너무 하고싶어졌다.

어깨 부상이 심했던 난, 선수협에 남아선 훈련할 수 없었다. 전지훈련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이유다. 날 배신자로 손가락질 해도 상관 없었다. 구단에는 조건을 달았다. "만약 캠프가 끝난 뒤에도 사태가 종료되지 않았다면 난 다시 선수협에 합류하겠다"는 것이었다.

캠프지에서 난 이정훈 코치님과 한 방에 배정됐다. 매일 밤 설득 작업이 계속됐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코치님이었지만 내 뜻을 굽힐 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됐다. 난 송지만 등 몇몇 후배들과 다시 계획을 짰다.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다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막상 한국에 들어가고 나니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했다. 노조로는 가지 못한 채 선수협으로 남게 됐다.

선수협 문제는 내게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더 이상 한화에 남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시범경기가 한참이던 어느날, 난 또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 "여기 LG트윈스 인데요…" 트레이드였다.

그래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난 행복한 놈이다. 그때 함께했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벗게 된 선수들의 이름을 우린 절대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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