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 "고교 감독 시절 집·땅 팔아 뭐했냐고?"

2007. 4. 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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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신화섭.임현동]

"욕만 먹고 살았지."

김성근(65) SK 감독에게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국가대표팀 좌완 에이스로 맹활약한 선수 시절을 거쳐 약한 팀을 일약 정상급으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지도자로 명성을 쌓아온 김 감독이다.

그러나 영광의 그늘에는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 "선수를 혹사시킨다" 는 등의 비난이 늘 따라 다녔다. 2002년 LG 감독을 끝으로 팬들 곁을 떠난 김 감독이 4년 간의 야인 생활을 마치고 올시즌 SK 사령탑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한층 농익은 관록으로 시즌 초반 SK 돌풍을 맨앞에서 이끌고 있는 김 감독을 문학구장 감독실에서 만났다.

▲재일동포의 생존법

김 감독은 1942년 일본 쿄토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형과 누나 두 명씩에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경남 진양 태생의 아버지는 김 감독이 중학교를 다닐 때 세상을 떠났다. 김 감독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찢어질 듯한 가난과 일본인들의 차별로 새겨져 있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셌다는 김 감독은 중학교 1학년 때 본격적인 야구 선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교 3학년 때인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어 부산 동아대에서 1년간 유학한 뒤 일본 실업야구에서 뛰다 61년 가을 교통부에서 국내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60년대 재일동포의 한국 생활이 그다지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모국이지만 주변의 괄시도 심했다. 일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설 땅이 없었다. 원래 활발했던 성격도 변해버렸다. 살아야겠다는 본능, 남에게 의존하지 말아야겠다는 의지는 그 때부터 생겨났다. 1964년 11월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는 마음이 들떠 가족의 반대도 무시했다.

가죽 코트에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내고 비행기를 탈 때까지는 좋았는데 이젠 언제 가족을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김포공항에 내릴 때까지 내내 울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도 안돼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야구로 성공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근성 있는 지도자

선수 생활은 화려했다. 1964년 실업야구에서 20승을 거두고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기업은행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62년에는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김응용(1루수)·백인천(포수) 등과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62년 창단한 기업은행에 스카우트될 때는 당시 서울 명동의 집도 몇 채 살 수 있는 50만환을 받을 만큼 최고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지나친 혹사로 어깨와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67년 일찌감치 투수 생활을 접었다. 1루수로 잠시 활동하다가 69년 마산상고(현 용마고)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기업은행과 충암고·신일고 등을 거쳐 OB·태평양·삼성·쌍방울·LG·SK 등 무려 6개 팀에서 16년째 프로 감독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온전히 시즌을 마친 13년 동안 준우승 1회·3위 5회·4위 4회 등 10차례나 4강 안에 들 정도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올해로 지도자 생활만 39년째. "선수 생활이 끝났을 때 이젠 최고 감독으로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고교 감독 시절 집도 땅도 모두 팔아 선수들에게 밥을 먹였다. 충암고 감독 때는 급성 간염에 걸려 의사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는데도 운동장에 나갔다. 그래도 제자들이 '감독님 덕분에 오늘이 있다'고 말할 때면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감독이라는 자리는

김 감독은 야구에서 감독의 비중을 묻자 "거의 다"라고 말하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스타팅 오더를 만들고 작전을 걸고 투수 교체를 하는 것을 모두 감독이 하지 않는가. 물론 경기는 선수가 뛰지만 선수가 할 수 있도록 바꾸어가는 것은 감독의 몫이다."

김 감독은 1989년 태평양, 96·97년 쌍방울을 일약 3위로 끌어올렸고 2002년에는 LG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약한 팀을 강하게 만드는 비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감독은 '1000원 야구·1만원 야구론'을 꺼내 놓았다.

"1000원 가진 사람과 1만원 가진 사람이 똑같이 생활할 수는 없다. 1000원 가진 팀이 1만원 가진 팀을 이기려면 똑같이 해서는 안된다. 훈련을 더 많이 하고 데이터로 더 연구하고 싸움을 걸어 상대를 자극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목적→방법→계획→실행→계속'이 중요하다. 선수들도 처음에는 강훈련을 힘들어 하지만 나중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게 된다."

▲마음 비운 야구의 신

김 감독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김응용 삼성 감독(현 사장)으로부터 "야구의 신"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김 사장(실제로는 39년생)은 김감독과 나이는 다르지만 1959년 한·일 고교대회 때 고교 3년생으로 처음 만나 동기처럼 지내고 있다.

김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 해 포스트시즌에서는 감독으로서 벤치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에는 '지면 어떡하지'라며 걱정했는데 그 때는 '아, 이렇게 되는구나'라며 제3자로서 경기를 봤다.

원래 훈수꾼이 더 잘 보지 않는가. 한국시리즈 1차전을 위해 대구구장에 들어섰는데 김용용 감독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너무 여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업가들 말에 '돈은 쫓아다니면 도망간다'고 한다. 승리도 마찬가지다. 뒤늦게 깨달아 창피하지만 승부에 초월하니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김 감독은 요즘 과거보다 한결 여유롭고 부드러워졌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부드러워지니까 편하다. 과거에는 내가 다 챙겼었는데 SK에서는 코치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2002년 LG 시절 함께 구단 직원으로 있던 아들(김정준 씨·현 SK 운영부 직원)이 '아버지는 왜 모든 것을 혼자 하는가. 그러면 한계가 있다'라는 말을 해 충격을 받았다. 또 이제 현역 최고령 감독이 됐으므로 행동에 조심하게 된다. 경기 중 쓸데없는 지시나 어필도 안 하려고 한다."

"우승을 한 번 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 감독은 빙긋이 웃으며 "하고는 싶다"고 답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좋은 멤버로 우승을 하는 것보다 약한 팀을 3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더 낫다. 우승은 못했지만 부럽지 않다. SK에서도 노력해 가르친다면 나중에 내가 떠난 뒤라도 우승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김 감독은 'SK 꿈을 현실로!! 극복!'이라고 적힌 수첩을 보여주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언젠가 절에서 본 문구가 기억난다. '지도자는 베풀되 원하지 마라'고."

신화섭 기자 [myth@ilgan.co.kr]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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